14卷7冊,續集4卷2冊 : 年譜, 四周雙邊半郭 21 x 16 cm, 有界, 10行18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26 x 28 cm.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이민성의 시문집이다. 아버지는 관찰사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평산 신씨로 인의(引儀) 권(權)의 딸이다. 1597(선조 30)년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1601년 승정원주서를 거쳐 이듬해 시강원설서에 제수되고 사서로 승진되었으며,서장관으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3년 예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에 전임되고, 이어서 병조정랑으로 승진되었다. 160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정인홍 일당의 반대로 제주점마어사(濟州點馬御史)가 되었다. 그 뒤 얼마간 일을 보다가 시사(時事)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08년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며, 문학(文學)으로 옮겨 사가독서 하였다. 이듬해 옥당(玉堂)에 선출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 3년을 마치고 홍문관수찬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교리․세자시강원겸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617(광해군 9)년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이 폐모론을발의하자 윤리와 기강에 죄를 얻음이 심하다는 내용의 차자(箚子)를올렸다가 이이첨 등의 모함을 받아 삭직되었다. 고향에 내려가서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헌부장령에 복직하였다.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성균관사성으로 통정대부의가자(加資)를 받았다. 이어서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로 승진되었다. 1627(인조 5)년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의 추천으로경상좌도의병대장이 되어 전주에 있던 왕세자를 보호하였다. 1629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그해에 별세하였다. 그는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 높았으며, 의리가 강해 광해군의 난정 때 간당(奸黨)들에게 모함을 받은 이덕형․이원익․영창대군을 구출하려고 힘썼다. 시문과글씨에 뛰어났으며, 명나라에 갔을 때 그 곳의 학사․대부들과 수창(酬唱)한 시는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중국 사람들이 그를 이적선(李謫仙 ; 이태백을 이름)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1,000여 수의 시가 전해지며, 저술로는 『조천록(朝天錄)』등이 있다.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 되었다.
이 문집은 1664(현종 5)년 저자의 양자 정기(廷機)가 간행하였고, 1903(광무 7)년 다시 중간되었다. 문집 중 시는 당시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특히 권6~8의 「연사창수집(燕槎唱酬集)」은 중국에 다녀오는 동안에 지은 시로서, 두보와 한유(韓愈)와비슷하다 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동해무조석론(東海無潮汐論)」은 우리나라의 동해에 조수가 없다는 설을 부인하고, 동해는 끝없이넓기 때문에 조수의 폭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결코 조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글이다. 「계백론(階伯論)」은사신(史臣)의 평을 비판하고 계백을 만고의 충신이라 천명하였다. 「조천록」은 저자가 중국에 서장관으로 다녀온 기록인데, 당시 우리나라와청․명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